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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거기서 살지~

내말이~ 

프랑크푸르트 학파 - [미학대계1],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순예 발췌

에술과 철학이 연대해야 할 필요성은 타인의 가치판단에 대해 논구할 때 가장 선명해진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지만, 욕망의 민주화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자신의 욕구를 끊임없이 상대화하면서 사는 일이 불가능한 만큼, 나에게 거슬리는 타인의 욕구를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는가, 그 경계 설정의 문제도 간단하지는 않다. 그런데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조절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욕구에 대해서도 철학적 성찰이 요청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은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이론 구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대학, 누구냐 넌..(카툰) 세상이야기


'우리 모두 패고 있었던 거죠' - 진보언론에 대한 단상 생각들

지난주에 [프레시안]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에 간적이 있다. 제목은 [한국사회 왜 지금 도덕인가?] 였는데 간만에 시간도 있고 해서 매우 추웠음에도 가보게 되었다. 토론회라는 이름에 '?'표를 한것은 어떤 대립되는 생각들을 가지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인데 그냥 '간담회'정돌고 성격 규정을 한다면 적절할 것 같다. 나름 큰 기대 없이 갔던 자리였고 시간도 2시간이었기에 나름 쟁쟁한 참여진임에도 어떤 심도있는 내용이 오가지는 않았다. (쟁쟁한 참여진 - 김규항, 우석훈, 김용철, 김민웅) 그래서 별 불만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인가 [프레시안]에서 간담회 기사가 떴고 귀퉁이에 살짝 비친 내 모습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후 [프레시안]에서는 3~4일 간격으로 출연 패널들의 발언 내용을 정리해서 올리고 있는데 그 어조가 사뭇 내가 느낀 것과는 달라 그것을 지적 하고자 한다. 먼저 [프레시안]에 올라온 글들을 링크해 본다.

1. 김용철 변호사 발언 모음기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1208145055&section=02

2. 우석훈 소장 발언 모음기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01212051004&section=02

3. 김규항 대표 발언 모음기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1212222911&section=03

4. 기타 토론회 관련기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1208133727&section=03

이 글들을 보면서 나는 조중동을 대할 때와 같은 불편함으로 진보매체라는 [프레시안]을 보고 있다. 어찌 된 일일까?
(아주 긴 시간-대략 3개월-이 지난후에....)

그것은 사실에 대한 글쓴이들의 '의도' 그리고 그 의도의 '불순함'이었을 것이다. 처음 프레시안의 글을 읽었을때랑 지금(아마 3개월이 흐른시점)의 차이점은 뿌연 안개같은 감정이 걷히고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느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먼저 김용철 변호사님은 우리사회에서 정말 용기있는 일을 하셨고 일반 범인인 나정도 되는 사람은 그런 위치에 오르기도 불가능하겠지만 스스로 내려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그들의 힘에 대항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김 변호사님은 아직 까지는 우리사회에대한 깊은 고민 보다는 피상적이고 청중에게 어필해야한다는 강박으로 토론회 내내 듣는이에게 안타까움을 주었다. 그리고 프레시안의 발언 모음에서 처럼 단정적이고 선동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만일 그런 느낌을 준 발언들이 있었다면 청중에게서 반응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살짝 '오바'한 경우에 해당한다. 내 얘기는 그걸 프레시안 기자들이 몰랐을리 없다는 것이다. 

김규항 대표는 개인적으로 진중권씨와 함께 초기인사(내가 기억하는 진보논객중에서)에 해당한다. 그의 글로 그를 처음 봤고 MBC100분토론에서 그가 나온다기에 일부러 기다려서 봤던 기억이 있다.(물론 매우 실망 했지만...) 그후 수 많은 이슈들과 수많은 논객들의 유입으로 그는 사라진듯 보였다. 그러다 근 10년이 지나서 직접 그를 다시 만나게 된것이다. 물론 간간히 그의 소식을 듣기는 했다. 어린이 진보신문([고래가 그랬어])을 만든다는 얘기도 그중 하나였고, 인터뷰책([B급 좌파]-글씨체가 이상해서 많은 분들이 '8급좌파'라고 읽는다고 한다.)이 나왔다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또하나 박원순씨를 비판해서 시민운동가사이에서 왕따 당한다는 말도 들렸다. 10년 전의 '실망'아닌 실망은 그동안의 나의 변화와 맞물려 그의 '꾸준함'에 대한 '인정'으로 변했다. 역시나 토론회에서의 그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더 확신이 있어 보였다. 느린 말투, 언제나 문제는 자본인 그의 대답,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건방 떤다고 할 말투 및 태도 등등.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의 경우 이는 '미덕'이다. 프레시안의 기사에서 김규항씨의 발언 역시 현장에서 뭔가 토론자들이 한가지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너무도 단호하게 기사를 읽는이에게 선언하고 있는듯이 비춰진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시한 번 지적하지만 프레시안의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우석훈 소장님은 그의 글을 읽은 적도없었고 직접적으로 만난적도 없다. 다만 그의 책[88만원 세대]가 매우 큰 울림을 우리사회에 줬다는건 오며가며 풍월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 그날의 토론자들 중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지적이며 영리한 사람을 꼽으라면 모두가 우석훈 소장을 말할 것이다. 그는 매우 영리하게 사회자의 우문(愚問)을 가벼운 이야기로 청중의 머리속에서 털어내고는 그것과 연관된 조금더 중요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것도 전혀 선동적이지 않고 자료와 조심스러운 태도 이 두가지를 청중에게 조심스레 펼쳐보여 원하는 결론으로 청중을 몰고 갈줄 알았다. 우소장의 발언을 정리한 프레시안의 기사 역시 위의 두 분을 다루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본 글의 제목 '우리 모두 패고 있었던 거죠'는 토론중에 우석훈 소장님이 예를 들었던 자신의 경험(사실 어디까지가 자신의 경험인지는 불분명하지만)에서 나온 말이다. 학창시절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모임에 나간적이 있는데 정말 진보적이고 열성이었던 선배가 여자친구를 지속적으로 때리더라~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경찰은 시민을 때리고 재벌 기업에서는 회장이 사장을 사장이 부장을 부장은 과장을 때리고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더라~ 는 애기였는데 지탄 받는 대상이나 지탄하는 대상이나 모두 '패고 있었던거죠'라는 말에서 따왔다. 이 이야기는 프레시안이라는 진보매체가 사실을 다루는 방식이 조선, 중앙, 동아, 매일, 한국, 문화, 세계등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나의 생각과도 통한다. 일전에는 [오마이뉴스]의 선동적이며 적당한 포지션 유지로 양쪽 진영으로 부터 '이익'을 얻겠다는 역겨운 모습을 이야기 한적이 있었다. 물론 그 정도에 있어서 프레시안은 '양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프레시안의 이번 태도가 우려되는것은 서운함과 우려가 더 많음을 말할 수 밖에 없다. 언젠가 많은 시간이 흐른후에 지금과 같은 사회의 모습들을 이야기 하며 토론의 한 패널이 '그땐 우리 모두 왜곡하고 있었던 거죠'라고 할 지도 모르니까


조폭 국가, 대한민국 - 박노자, 펌글 세상이야기

조폭 국가, 대한민국
만감: 일기장 2010/12/03 08:32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30027
2년 전에 숙환으로 돌아가신 컬럼비아대학의 찰스 틸리 교수님께서 한 때에 아주 재미난 글을 쓴 바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국가건설"과 조폭 (조직폭력)의 "보호세 갈취"를 비교하면서 유럽에서의 절대왕권의 기원을 설명해준 논문이었습니다 (https://netfiles.uiuc.edu/rohloff/www/war%20making%20and%20state%20making.pdf). 정확하게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도 아니고 다소 이론성이 약하지만, 중세 이후 유럽에서의 국가 기원에 대한 정치학적 설명으로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이 설명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중세후기의 유럽은 크고 작은 봉건 영주들이 싸우고 싸웠던 하나의 큰 전장이었는데, 이들 영주들이 농민, 상인으로부터 세금을 뜯어먹을 수 있었던 명분은 결국 "보호"이었다는 것이죠. 누구로부터의 보호냐 물어보면 결국 서로 서로로부터의 보호인 셈인데, 어쨌든 A시나 B후국의 양민으로서 그 해당 지역의 후작이나 남작 내지 대주교의 "안정된 수취"는 이웃 지방 C백작에 의한 점령과 점령지에서의 과도한 징세보다 더 좋았을 수도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해서 봉건 세력들이 일종의 "보호 서비스 시장"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그 논리상 과일장수나 대마초 장수로부터 텃세를 뜯어내는 뒷골목 왈짜들의 "징세 명분"과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한데, 화기가 고도화돼서 중세 "골목 짱"들의 요새들을 쓸어버릴 만한 대포들이 등장되니 마르크스의 "시장 독과점화 경향" 논리대로 보호서비스 시장에서 제일 큰 "보호 서비스 제공자"만 살아남은 것이죠. 큰 대포들을 살 만한 "업자"들만 살아남은 것인데, 그게 바로 우리가 익히 아는 분란서, 서반아, 포도국 (葡萄國) 등등 절대왕권 국가들입니다.
 
이걸 보고 혹자가 제게 "국가와 조폭의 차이도 모르냐, 국가는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는 공공기관의 총체이며, 조폭은 비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익집단일 뿐이다"라고 반문하겠지만, "공공성이 있는 공권력으로서의 국가" 운운은 어디까지 부르주아 혁명을 거쳐 나름대로의 시민권력이 확립된 근대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전의 유럽 국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권력"과 사실 사이가 좀 멀었어요. 1572년 불란서 파리 등지에서의 성바돌로매대학살, 조총을 들고 "개신교도"라고 의심되는 자신의 백성들을 사냥했던 임금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공민", "공법"의 논리보다 "우리 천주교파냐, 저 개신교도파냐"의 논리가 우선이었다는 것이죠. "짐 즉 국가"와 같은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수 있었던 절대왕권 아래에서는, 근대적 "공법"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작동될 수 없었지요. 그 논리가 작동되기 위해서는, 명색상의 공권력을 사실상 사적으로 이용해온 국왕이나 귀족들에게 한 가지 약이 필요했던 것이죠. 단두대 (斷頭臺)라는 이름의 명약 말에요. 뭐, 그 약물 투입 과정을 거친 나라라고 해도, 꼭 전근대적 권력 사유화 시대로 퇴보하지 않겠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반동의 시대에는 언제든지 가능한 일에요. 이번에 위키리크스에서 폭로된 미 국무성의 비밀보고서에서 러시아를 "완전히 부패한 마피아 국가"라고 - 매우 옳게 - 규정했지만, 이는 10월혁명과 그 후속정권 (스탈린주의 정권)의 역사적 패배 및 몰락에 따른 전근대적 국가구조로의 후퇴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미 국무성 관료들의 말대로, 지금의 러시아는 푸틴 휘하의 관벌들의 사유물이고, 저들이 국가적 세금을 횡령할 뿐더러 정기화된 상납제도를 통해 "사설 세무서"들까지 운명한다는 것도 맞습니다. 단,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을 솔직히 말씀드리면 미 국무성이 좋아할 리는 없을 것이죠. 근대 자유주의 부르주아국가들이 단두대를 그 "자궁"으로 하고 있지만 그 탄생의 고통을 망각하려 하는 것이지 적극적으로 사고하려 들지 않단 말에요.
 
러시아는 그렇다 치고, 단두대라는 천하명약의 맛을 제대로 모르시고 계시는 아등 (我等) 동방예의지국의 대감님네나 영감님네, 그리고 그 이하의 거상(巨商)벌족(閥族)들도 아무래도 중세후기에 사병들을 거느리고 평민들을 마음대로 칼로 치곤 했던 구라파주 후작과 남작들의 흉내를 열심히 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예컨대 SK왕국 왕자님의 거동을 한 번 보시지요. 감히 왕자님의 궁궐 앞에서 불평불만을 나타내는 등 그 무서운 불경죄를 저지른 나이 든 백성에게 손수 곤장을 친 왕자님에게는, 16세기의 불란서와 달리 호위하는 사병(私兵)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조총을 든 사병보다 더 무서운 무기가 있는 것에요. "매값"이라는 표현방식에서 보여지듯이, 그에게는 국가가 제대로 과세하지도 못하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그 화력이 그 어떤 조총이나 대포보다 더 센 무기가 주어져 있는 것이죠. 대한민국에서는 이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소(小)왕국이나 그 왕자님들은, 정말이지 못할 게 없습니다. 감히 일회용 소모품이 아닌 당당한 노동자로 인정해달라고 집단행동을 취한 "머슴"들에게는 음식물 반입을 금지해 "하찮은 상것"들을 마음대로 굶겨도 되고, 용역이라는 이름의 "사병이 아닌 사병"을 풀어서 그들의 갈비뼈를 뿌러뜨리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면, 재미삼아 "말 안듣는" 동업자를 포로로 잡아 물고문까지 해도 되는 것이고, 음주운전을 단속하려는 경찰에게 중상을 입혀도 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불패의 무기만 보유하면, 양민들을 구타하든 굶기든 짓밟든 하등의 손실을 볼 일이 없단 말이죠. 약 3년 전에 약간의 약주를 잡수셨던 그 왕자님을 감히 "건드린" 한 평민에게 하도 멋지게 (?) 곤장을 친 한화왕국 군주님을 기억하십니까? 한 때에 그 활극 (?)을 보고  전국이 분노로 들끓고 있었지만, 과연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가장 진보적 (!) 대학에서 자랑스럽게 위치하는 "승연관"의 명칭은 바뀐 바 있었습니까? 바뀌지도 않았지만, 확언컨대 군주님께서 평민을 매로 "가르치는" 중대한 교화사업하시다가 아예 살인을 저지른다 해도 절대 바뀔 일은 없습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은 그러한 크고 작은 군주님들의 사유물이고, 이 나라에서 서식하고 있는 소위 글배운 이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배고픈 강사생활이나 비주류 삶을 살거나 이민가고 싶지 않는 이상 이를 다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조폭들이 다스리는 골목에서 건강히 잘 살자면 앞가림을 조심스럽게, 잘 해야 하는 법이죠.
 
여러분, 딴 걸 몰라도 자기기만이라도 하지 맙시다. 우리가 상식과 공법이 통하고 시민들에게 존엄성이 허용되는 근대적 사회에서 사는 게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복잡한 경쟁/담합 관계에 있는 수많은 "영주님", "짱", "보스" 들이 공동 관리하는 영토에서 살고 있는 것이죠. 똑같은 논리로 운영되는 북조선과의 차이라면, 이 쪽에서는 "수령님"들이 단수가 아닌 복수고, 우리가 그들이 내세우는 대리인들 중에서 몇 사람을 골라 소위 "대통령"으로 만들거나 "국회"로 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반대자의 목소리를 완전히 죽일 수가 없다는 것, 이 정도입니다. 공정선거가 있다는 게 마침 우리와 북조선의 아주 큰 차이처럼 보는 이들이 있지만, 대학이나 교회부터 주요 신문까지 사회의 모든 기관들이 그 "영주님"들의 손에 쥐어진 상태에서는 선거, 선거직 공무원의 역할이란 "영주님"들 사이의 "교통정리"지 그들의 난폭한 "보호세 뜯어먹기"에 대한 그 어떤 본격적인 억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주님"들도 문제지만, "매값"을 매겨 평민을 거의 죽음으로 몰아간 "나쁜 주인"을 죽으라고 욕해도 총체로서의 "주인들"이 소위 "국민경제"를 잘 이끌어나가 "우리 모두를 살찌울 성장"을 보장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고 사는 백성들이야말로 더 큰 문제입니다. 바스티유가 "국민의 요새"가 아닌 부르봉 왕가의 성곽이었듯이, 대한민국의 경제란 "국민"과 무관한 이씨 족벌, 정씨족벌, 최씨족벌 등등 "소왕국"의 사유물에 불과합니다. 남의 사유물들을 이렇게도 애지중지하고 자기 것처럼 여기는 이 동방예의지국의 백성은 참 착한 백성이죠?
 
최씨 왕자님에 대한 분노는 지금 하늘 찌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지배자에 대한 도덕적 분노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현대판 "봉건 영주계급" 전체를 그 안락한 자리에서 몰아낼 수 있는 노동계급이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조직화돼 있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 계급의식으로 무장돼 있는가 입니다. 적어도 주인네들 만큼이나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뚜렷하게 의식해야 주인네들과 힘겨루기라도 할 수 있단 말에요.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 노동자계급은 "봉건영주님"들에 비해 한참 떨어져 있는 것이죠. 그들은 이미 대자적 계급이지만, 우리의 계급적 각성은 아직 시작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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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쓰임새 - 펌글 세상이야기

"민족"의 쓰임새
만감: 일기장 2010/10/16 19:01  
저희 학과의 일본학 석사과정에 계시는 한 학생 분은 일본을 중심으로 해서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중, 고등학교 인권 교육의 현주소에 대해 논문을 쓴다고 하여 제게 한국 국내의 사회, 도덕 교과서를 구해달라고 최근에 청을 한 적은 있었습니다. 저야 그걸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지도 오리무중이었지만, 국내의 고마운 친우들의 덕택에 그 교과서들을 구해, 학생에게 주기 전에 본인도 쭉 읽어냈습니다. 물론 예상한 대로, "인권"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약자 보호, 소수자 보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집단(의 대표자/상위자)의 요구를 거절할 개인의 권리까지 거의 언급되지 않아, 이쪽 (노르웨이)에서 생각하는 인권과는 아주 딴 판이었습니다. 즉, 예컨대 교실에서 반말을 해대는 교사에게 "반말를 쓰지 마십시오, 공석에서 공적인 언어 형태를 쓰는 것은 공인으로서의 도리이입니다"라고 학생으로서 일갈하는 것도 당연한 인권이라는 사실을, 이 교과서를 다 읽어도 절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뭐, 인권을 집단 생존권과 집단 안에서의 약자 보호 정도로 이해하는 북한의 공식 담론과 대동소이한 것이니 놀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표피적인 부분이라든가 국제적 질서에서의 위치라든가 등등이 서로간에 다르지만, 남한 사회 운영의 기본적 원리가 많은 면에서 이북과 상통한다는 것은 제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바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본적 생리, 즉 보수적인 위계서열성 같은 걸 바꾸자면, 교과서 수정 정도도 아니고 젊은이들을 위시하여 현재도 미래도 빼앗긴 모든 이들의 대대적인 반란, 일종의 (민주적이고 미래 지향적) "문화 혁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자면 지금보다 훨씬 더 절박하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이들이 그 입장의 절망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인권"은 그렇다 치고, 그 교과서들에서의 "민족"의 담론적 위치는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일단 1990년대 후반 이전의 교과서와 판이하게, "민족" 정의에서 "단일"이라는 말은 삭제됐죠. 아무래도 남한 지배자의 국제적 위신에도, 남한 무산계층이 가면갈수록 피부색이 다양해지는 가시적 현실에도 맞지 않으니 그리 된 셈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이야기는 다소 "멋이있어졌다"고 하고나 할까, 가일층 복합화됐다고나 할까 어쨌든 과거의 단순한 "우리 모두 한 핏줄"과 아주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한 교과서는 <상상된 공동체>의 앤더슨부터 과거의 민족주의 연구 대가인 한스 콘 등등까지 다 두루 인용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의 성장에 있어서의 시민사회와 언론자본의 역할까지 언급하는 등 거의 대학교재와 같은 냄새를 풍겼습니다. 이 정도의 텍스트를 읽으면, 학생들이 아마도 "민족"과 "국민"이 다르다는 점이라든가 근대적 민족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유관하다는 점이라든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진일보라고 호평할 부분이겠지만, "민족" 이야기의 또 다른 부분들은 거의 예전 교과서 그대로이었습니다. 한국 국민의 "중핵"으로 당연히 고대에 이미 그 형성과정이 시작된 "우리 민족"이 등장하며, 그 "문화의 우수성", 그 "수난의 역사", 그리고 우수하면서도 수난적인 역사의 당연한 귀결로서의 자본주의적 중진국인 남한의 "발전"과 "세계적 위상의 상승", 또한 남한에 충성을 바쳐야 하는 "해외동포들의 뛰어난 활약" 등등은 그대로 다 나타납니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이루었다는 남한은, 오천년 민족사의 절정이기도 하고, 그 민족적 우수성의 결정체이기도 하죠. 교과서 담론 속에서 말씀입니다.
 
"계급"을 살짝 빼버린 이 "민족사" 이야기는, 북한의 김일성 빨치산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걸, 굳이 따로 설명 안해도 자명하게 보일 듯합니다. "수난"의 주체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임진왜란 때에 백성들은 수난을 당해도 다수의 의병장과 공신 등을 배출한 재지사족들은 오히려 그 영향력을 증가시켰으며, 전후에 그 노비의 수를 많이 늘리기도 했죠. 마찬가지로, 식민지 시대는 수확의 70%까지 소작료로 바쳐야 했던 소작인들에게야 수난이었지만, 마산 근방의 엄청난 땅을 사들여 그 소작인들이 수확한 쌀을 마구 일본에 수출했던 이병철이라는 와세다대 출신에게는 엄청난 기회이었죠. IMF는 김삼식이, 이영자들에게는 수난이었지만,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비롯한 주요 재벌들은 지난 12년간 오히려 이윤율을 많이 늘렸다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우수성"의 정확한 뜻은 무엇입니까? 월성의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들을 보면 신라는 백성들에게 거두어진 쌀을 정확하게 재고 적는 우수한 필기 문화를 자랑했지만, 그렇다고 그 쌀을 빼앗기고 각종 전쟁에 동원돼야 하는 백성들은 과연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남한의 산업화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면들도 있지만 (적어도 외국 재벌의 국내 직접 진출을 막았으니 정말 다행이지. 멕시코 꼴 나지 않았으니...) 무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산업 구조의 미래 전망은 깊어지는 세계공황 속에서 극도로 불투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도적 민주화도 평가되어야 할 면들이 많음에도, 그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이북처럼 군인들을 4대강 공사에 동원시킨다면 아무래도 문제는 아주 심각합니다. 단순히 제도적 민주화만 가지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죠. 한 마디로, 삼성가부터 백혈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노동자 가정까지 다 뭉뚱그려 "민족"이라고 호칭하고 계급적 모순을 제외한 그 "역사"를 쓴다는 것 자체는 웃기는 일에 불과하죠.
 
그건 다 그렇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문제는 남아요. 남한이라는 커다란 착취공장의 주인님들이 이 낡아빠진 "민족"의 틀에 왜 이렇게 애착이 깊을까요? 본인들이 여유가 날 때에 중세국어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휴가 때에 경주에 가서 첨성대 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퇴계의 제자처럼 투호를 즐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다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익히고 성인이 되면 골프치고, 적당한 시기에 미국에 건너가 그 상류층 문화, 언어, 가치관을 철저하게 익히는 "국제 귀족"들인데 말입니다. 이들에게 "민족"은 과연 모슨 소용이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답변은 약 세 가지일 수 있습니다:
1. 그렇지 않아도 주인님들이 이미 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 머슴들과의 "연대감 키우기" 차원입니다. 즉, "민족"을 이용하여 머슴들에게 주인님까지도 "우리 모두 다"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걸 주입시켜야 하기 때문이죠.
2. 해외 교포와의 관계 관리용입니다. 교과서들은 교포들의 충성이 오로지 남한 국가에 가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죠. 재미교민들에게 병역 등 남한 국가의 권위주의적 요소들이 무거운 짐이 되는 반면, 재중 교포들에게 남한 자본은 무자비하고 오만한 착취자 이상으로 보이지 않죠. 이 모든 모순들을 무마하기 위해 그 "민족"은 절실히 필요하죠.
3. 북한 영토와 주민들을 확보할 명분입니다. 남한 지배자들이 이북의 "적화야욕"을 갖고 떠들지만, 북한이 약해질 경우 본인들도 분명히 그 영토와 남은 주민을 확보할 생각을 갖고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대중 관계상 가능하다면). 그쪽 자원도 있지만, 일단 고령화돼가는 남한 사회에 다수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편입돼야 중국 기업들과의 제대로 된 경쟁이 가능해질 것이지 않습니까? 흡수 통이과 같은 시나리오가 이루어진다면 이북 인구의 절대 다수가 거의 "세습 천민"이 되어서 대대로 남한 지배자들을 살지워야 할 것이지만, 이 모든 야만과 모순들이 다 "민족"의 이름으로 합리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님들이 아무리 칼리포니아에서 집 몇 채를 갖고, 집에서 영어를 쓰고 추석 때에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에 가서 골프친다 해도, "민족"이라는 말을 교과서에 꼭 삽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고교철학 I - 인간, 철학, 형이상학 발췌

- <지루하다는 것은 순수 시간을 느끼는 것> p. 96

- 내가 시간을 추상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역시 추상할 수가 없다 .... 내가 상상력에 의해서 구체적인 시간을 약화시킬 수 있었던 거소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연장(e'tendue concre'te)을 약화시킬 수는 있다.    p. 96

- 당신은 여기와 지금(hic et nunc)에서 벗어날 수 없다.  p.96

- 우나무노(Unamuno)가 말한 .... 우리들의 잔인한 폭군   p. 97

- 시간을 대하는 우리들의 상황과 공간을 대하는 우리들의 상황은 동일하지가 않다.  .... 라뇨(Lagneau)는 <공간은 내 능력이며, 시간은 내 무력함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p. 97

- 공간은 가역적이지만, .... 시간은 불가역적이며 한 방향으로 진행할 수 밖에 없다. .... 나는 작년을 기억할 수는 있지만, 나는 추억을 발전기키고 추억은 변형된다. 시간은 모든 것을 싣고 가버리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e) ... 시간의 파괴적 무관심, <체스놀이를 즐기는> 이 어린 아리의 파괴적인 무관심을 느낀다. .... 프루스트(Proust)...<그러나 이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오래전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모습들은 축제가 끝나고 세수를 하더라도 벗겨지지 않는다.>    p. 98

- 기억 감정론 ... 우리의 회상은 생성의 기능이며, 우리의 추억은 우리 자신과 함꼐 발전하기 때문이다.   p. 98~99

- <네가 자연스럼게 살고 있는 이 인생, 또 네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 인생을 ,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 하고, 무한히 여러번 더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인생에는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 .....먼지 가운데의 먼지의 너도 되돌려 지 것이다.>  p. 99

- ... 인간 시간의 불가역성과 대립시키던 자연 시간의 표면적인 가역성에서 .....  p.99

- <움직이지 않는 영원의 움직이는 모습> ... 플라톤, 티마이오스

- 후회의 고통은 과거에 대한 나의 무력함의 표현이다.  .... 시간의 잔인한 마술에 따라서 나의 행동은 운명이 된다. 나의 자유행동은 과거의 행동이 되면서 숙명으로 변한다.  p.100

- <이렇게 짧은 일년이 어떻게 이렇게 긴 하루들로 만들어지는가?> p. 100

- 시간은 나의 존재 자체와 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시간을 취득할 수가 없지만, 공간은 나의 밖에 있기 때문에 공간을 취득할 수는 있다. .... 가브리엘 마르셀 : 나는 시간이며, 공간을 <소유>한다. p.101

- 공간은 문제와 기술이 우선권을 갖는 장소이다.  p. 101

- ( .... 규정되지 않은 선분 위에다 규정된 선분을 옮겨 놓는 것이다.) p.101

- 과학은 직접 경험의 재료들을 공간 속으로 옮겨 놓음으로써만, 우주를 표현하고 또 우주를 정복하게 된다.  p. 101

- 베르크손에 따르면, 공간에 의해서 측정되어지는 이 추상적이고 규칙적인 시간(temps)은 실재하는 시간, 의식에 의해서 체험되는 지속(duree')을 왜곡 시킨다. 공간과 지속의 <사생아적 개념>, 우리의 시계에 순응된 시계의 시간은 자유롭고 야생적인 자연적인 시간, 질적이며 측정할 수 없는 체험적인 지속, 기쁨의 리듬에서는 약동하고 지루함의 템포에서는 맥이 빠지는 체험적 지속을 배반한다. p. 103

- 제농은 구체적인 지속 중에서 체험되는 운동을 공간의 궤도와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p.105

- <간단히 말하면, 운동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요소가 있다. : 총과된 공간과 공간을 통과하는 행위 연속되는 지점들과 이 지점들의 종합.>첫번째 요소는 등질적인 양(quantite' homogene)이며 ; 두번쨰 요소는 ... 일종의 질(qualite)이다.  p. 106

- 베르크손에 의하면 , 실천적인 필요가 공간적인 외재성의 요청에 따라서 만들어내는 분석적이고 연역적인 지성은 체험적, 질적, 이질적, 구체적 지속을 파악할 수 없다. 연역은 시간의 부정이다. 어떤 명제를 다른 명제로 부터 연역한다는 것은 그 다른 명제가 어떤 명제와 동일하다는 것 ...을 밝혀내는 것이다. .... 미래를 현재로부터 연역한다는 것은 미래를 현재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미래가 현재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 이성의 이상은, 결과를 원인으로 환원하고 결과를 원인과 완전하게 일치시킴으로써, 시간적인 불가역성을 피해 보려는 것이다. <설명하는 것은 동일화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동일성이 시간적인 연속을 대신할 것이다. p.106

- 존재(existence)는 새로움의 계속적인 분출이며, 지속(duree')이다. p. 107

- 이후는 이전에 의존되어 있지만 이전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이전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p. 108

- <지성의 특징은 생명에 대한 몰이해> 즉 지성은 지속을 이해할 수 없다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그러나 논리 형식의 무력함을 이성의 전체적인 무력함과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전적인 연역 논리가 실패한 곳에서, 변증법적 논리는 성공할 수 있다. 변증법은 동어반복적인 분석에 따라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모순에 따라서 진행한다. 변증법이 사물과 개념을 고찰할 때 <사물들과 개념들의 상호 연관성, 이것들의 상호 작용, 상호작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이것들의 수정, 이것들의 발생, 이것들의 발전, 이것들의 쇠퇴를 통해서 고찰> 하며, 이렇게 고찰하면서 변증법적인 방법은 생성 자체의 법칙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변증법은 상반되는 것들의 대림과 통일에 따라서 진행하면서, 모순 상호 작용, <비약에 의한 진보> 등과 같은 생성의 특징들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한다. 변증법적 사유는 동일한 것으로부터 동일한 것으로 진행하지 않고, 정립(these)에서 반정립(anti-these)으로 그리고 종합(synthese)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이 세 단계도 일정한 리듬과 유사한 과정의 변함없는 항구성을 움직이는 생성 속에 도입시킨다. 따라서 변증법에서도 역사 변화 속에서 동일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p.108

- ... 나 자신의 존재인 동시에 매 순간마다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p.109

- 만일 내가 지속의 흐름 속에 완전하게 들어가 있다면, 나는 이 지속이 지속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것이다.  p.109

- <시간에 대한 판단은 시간의 밖에 있는 판단이다>. 나는 시간 속에 있는 의식인 동시에 시간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생성을 벗어나 있고, 생성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 나의 시간성의 유일한 양태는 현재 뿐일 것이다. ...... 나의 존재는 매 순간 정확하게 일치할 것이며, 나는 시간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생성의 흐름에서 떨어져 있다. : 어떻게 보면, 나는 현재에서 벗어나는 적이 없고, 또 어떻게 보면, 나는 끊임없이 현재의 밖으로 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말과 같이,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다.     p.109

- 존재동사의 이중기능 / 존재동사(be동사)는 계사 .... 술어를 주어와 연결 시켜주는 역할만 한다. ...... etre동사는 단순히 소속만을 나타낸다. ... 절대적인 의미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실재하는 존재(existence)를 긍정하고 있다. ...얼핏 보면 exister(실재한다. 존재한다)동사는 etre동사와 동일한 차원에 있다. .... 도로변의 이 소나무는 존재한다(est)고  할 수도 있고, 실재한다(exister)고 할 수도 있다.  p.130

- 철학에서는 existence(실존, 존재)를 essence(본질)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본질이란 개념은 etre동사에서 직접 유래한 것이다. etre동사의 부정법은 라틴어로는 essence이다. 따라서 essence는 단순하게 그 사물인 것을 의미한다. existence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며, essence는 그 존재하는 사물이 무엇인가, 그 사물에 고유한 근본적인 속성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p. 130

- 성 안셀무스가 제시한 존재증명 .... 완전한 존재라고 정의된 신의 본질로부터 신의 존재를 연역하기 때문이다. .... 유한한 존재의 본질은 .... 존재를 포함하지 않는다.  .... 데카르트에 의하면, 신의 관념으로 부터 신의 존재를 연역할 수 있다. 신에 대한 관념은 완전한 존재레 대한 관념이다 :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참으로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는 존재라는 성질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존재의 본질이 갖고 있는 속성들 중에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이 필연적인 존재는 완전성이며 전체적인 질이라 할 수 있다.   p.131

- 칸트는 이 증명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엄밀한 의미의 존재(existence)에는 논증이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 논증이나 개념에 속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 존재는 속성이 아니며, 존재는 어떤 개념에 포함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p.132

- 존재는 절대적인 정립이고 주어진 어떤 것이다.   p.132

- 존재(existence)는 여하한 경우에도 본질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p.132

- 존재는 <절대적 정립>이며, 모든 개념의 밖에 있고, 연역할 수 없다는 점 ....  p. 132

-  존재 내에는 독자적이고 환원할 수도 연역할 수도 없는 비합리적인 것이 있다는 것 ...   p.133

- 라이프니쯔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p. 134

- 스피노자는 <삼각형의 특성은 삼각형에 대한 정의로 부터 나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모든 특성을 가진 이 세계는 신으로부터 나왔다.  p. 134

-  부조리란 말은 ..... 이성에 따라서 연역할 수 없는 것이다. ..... 존재의 무근거성, 즉 아무 것도 지불하지 않은 무료성(無料性)은 부정, 슬픔, 고통으로 가득찬 졍험과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p.135

- 실존철학이 문제 삼고 있는 실존은 무엇보다도 나의 실존이다. 사물은 존재한다. 그러나 사물은 자기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 사물은 존재하지만 실존하지는 않는다. 사물은 <즉자적으로(en soi)> 존재하지만 <대자적으로(pour soi)>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나이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과 나 자신은 <나에 대해서(pour moi)>존재한다.  p. 136

- 플라톤의 철학은 합리주의 철학과 실존철학을 모두 포함한다. 첫째, 그의 철학은 대화이기 때문에 실존철학이다. ... 둘째로 소크라테스의 탁월한 역할 때문에 실존철학이다. .... 마지막으로 신화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실존철학이다. 달리 말하면, 그는 관념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우화적인 이야기를 사용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로고스나 추론적인 이성이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곳에서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서 설명하는 비유적인 우화를 사용한다. 신화는 실존 특유의 문제를 제시한다. 즉 플라톤에 있어서는, 신화는 시간성의 문제를 제시한다. 실제로 이성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단지 어떤 진리로부터 다른 진리로 연역해내는 것이며, 시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진리들이 서로가 서로를 직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p. 137



- 실업자는 노예다. 빈곤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p. 210

- <절대적 자유라는 관념은 자연과 반대된다고 할 수 있는 초-자연적,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관념은 극한으로 이행한 곳에 존재한다 : 여러가지의 원인들로부터 연속적으로 벗어나서 어떤 원인과도 무관하게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p. 213

- '자유는 증명될 수 없다' / 자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 어떤 명제를 증명한다는 것은 그 명제의 필연성을 밝히는 것이다. 즉, 그 명제가 제시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유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이라면, 자유는 우연성 즉 필연성의 부재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알랭(Alain)은 <자유에 대한 증명은 자유를 죽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p.214

- 나는 이 육체의 저항과 고통에 반항하는 나의 자유를 체험한다. p. 216

- 이해관계가 없는 행위 ; 자신으로 부터 나온 행위 ; 목적이 없는 행위 ; 따라서 지배적인 것이 없는 행위 ; 자유로운 행위 ; 본래적인 행위. p. 216

- 도덕적 의무는 필연성과 다른 것이다. 필연성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하며, 자유와 의무를 배제한다. ....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도덕적 의무는 자유를 포함한다.  p.219

- 도덕적 행동의 동기에는 가치에 대한 매력이 들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오는 이유없는 무상한 선택의 표출이 아니다. 쾌감이나 물질적인 이해심의 강한 유혹 때문에 과오를 범하게 된다.  p.220

- '자유와 필연' / 스토아 철학이나 스피노자 철학과 같은 필연성의 철학 ....  p. 220

- 스토아 철학은 신의 필연성에 순종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다. <신을 따르는 것이 자유이다.> 피할 수 없는 결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자기에게 부과된 법에 복종하는 것이 자유이다.> p. 221

- '스피노자의 자유는 필연에 대한 이해이다.' / .... 우주 속에 있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이 불행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나는 평온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나 개인이라는 좁은 시각에서 나의 고통을 대하고 괴로워하지 않게 될 것이고, 전체의 관점에서 즉 모든 사물의 연관 관계에서 나의 고통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고 있으나, 신의 관점에서 동일시하고 있다. 이러한 신의 관점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전체적인 관점이다).  p. 223

- 이성은 직접 작용하지 않고, 우회하여, 즉 자연법칙을 <매개>로 하여 작용한다. p.228

이어지는 내용

1991-2010 반동의 시대여, 안녕?-펌글 세상이야기

1991-2010 - 반동의 시대여, 안녕? 
만감: 일기장 2010/09/25 19:09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8726 
 
 
 
 
사학자들이 대개 "거리"를 좋아합니다. 시사를 논하게 되면 온갖 개인적 호불호나 감정 등이 다 개입되지만, 약 30년 이상의 거리를 두면 어느 정도 감정을 빼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사학적 "중립성" 확보가 더 쉽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사학자 개인이 피부로 느끼는 "위험도"라는 문제도 가미됩니다. 가령, 남한의 보수적 사학의 원조격인 두계 이병도 선생께서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리버럴이었으면서도 아주 골수의 반북파, 반공파이었습니다.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이다 보니 "공산 치하"나 "공화국 치하"를 두려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죠. 재산과 신분을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감 만큼의 강력한 감정은 세상에 있습니까? 한데, 오늘은 비록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 지향의 사학자라 해도 박헌영이나 체게바라를 원하기만 하면 꽤나 중립적으로, 감정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사자, 박제화되어 박물관에 전시되게 된 사자는 별로 무섭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거리"라는 게 사학자에게 아주 귀중합니다. 그런데 제가 한 번 이 관습을 깨고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시대, 즉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사상사적으로 사고해볼까 합니다. 그러한 시도를 또 해봐야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해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좌우"라는 축을 사용하자면, 지난 20년은 말그대로 하나의 "반동의 시대"이었습니다. 해방 직후와 6.25 전쟁 때에 식민지 시대에 자라난 토착적 좌파가 남한에서도 (사실, 곧 북한에서도) 철저하게 학살된 이후로는 한국에서 "좌파"가 1980년대 중반쯤에 재정립될 때까지 약 30년이나 소요됐습니다. 즉, 이념계의 중심은 1953-1985년간 아주 서서히 "왼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이죠. 1950년대의 화두는 주로 "민주주의" 정도이었다면, 1960년대에 굴욕 외교 반대 속에서 "식민지 유산 청산" 등 "민족적" 문제들이 첨가됐으며, 1970년의 전태일 의거 이후에 "노동" 문제가 재발견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에서 다시 한번 "사회주의"가 말해질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1990년대 초반의 일련의 사태들이 이념계의 중심축을 다시 한번 아주 급진적으로 "오른쪽"으로 이동시켜놓았습니다. 보통 형해화된 소련, 동구권, 북한의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의 몰락 내지 위기를 주원인으로 거론하지만, 꼭 그것만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세게체제에서의 위치가 급상승됨에 따라 남성, 고숙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현저히 상승되는 등 노동계급의 일부가 체제내화되어 노조관료의 일각이 보수화된 것도, 1987년 이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구 운동권의 지도층의 상당부분을 변절시키면서 성공적으로 흡수, 활용한 것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었습니다. 부유해지고 복합화된 남한 사회의 포섭력, 흡수력이 강화돼 반체제적 움직임들이 탄력을 잃은 셈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사상계의 중심축은 우향우를 거듭했습니다.
 
"우향우"의 구체적인 방식은, 특정 지식인 그룹의 체제내 포섭 방식에 따라 결정되어졌습니다. 부르주아 정당에 흡수된 구 운동권의 주도층 다수는, 대개 1950-1970년대 식의 "민주주의" 논리를 부활시켜 거기에다 "시민" 등 유행어 몇 개를 첨가시켜 "시민 민주주의" 발전을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땅 부자 1%가 전국 부동산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5대재벌의 총매출액이 이미 1994년에 국민총생산의 약 54%를 차지하는 나라, 즉 극소수가 절대 다수를 경제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초과독점의 나라에서는 과연 "민주주의" 자체가 무슨 효력이 있겠느냐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박물관이나 대학부터 건설사와 이동통신업체까지 모든 것을 다 하나의 세습독재형 "초과 재벌"이 소유, 지배한다면, 청와대가 아무리 시민 운동가들의 완전한 차지가 되어도 결국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 사회 법칙상) 재벌의 의지가 당연히 이길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르주아 정치판에 흡수된 구 운동권의 "작은 수령"은 이런 당연한 질문을 자기 자신들에게 던져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게, 천문학적 자금이 사회의 판도를 결정하는 곳에서 일개 신화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본인들이 "벌거벗은 임금" 신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시절의 "개혁" 희비극의 씨앗은, 이렇게 1990년대초반부터 천천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의 "지도자" 급은 그 고귀한 몸둥이들을 주요 정당에 비싸게 팔았지만, 위치가 그리 높지 않았던 "이념가" 등은 대학 교직 진출에 성공하여 재벌 사회의 "지식 관리자"가 되지 못하는 이상 자신의 두뇌의 소출을 대중 교양서 출판 시장에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장사 방식을 아주 거칠게 이분하자면 "수입상"과 "고물상"으로 나누어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구주 언어에 밝거나 약간 "개화파적" 기질의 "수입상"들은 주로 "포스트모던" 철학과 그 파생물들의 국내 수입 및 판매에 주력했습니다. "근대성의 내재된 규율성의 비판" 정도면, 한 때에 1980년대의 "독점자본 반대" 만큼이나 아찔하게 느껴졌습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죠. "근대성의 내재된 규율성"을 비판하시는 선각자 분들은 기차를 안타나요? 그 기차의 기관사가 규율성 타파의 의미에서 예컨대 자의적으로 10분, 20분 정도 연발한다면 과연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운이 좋으면 병원, 운이 나쁘면 무덤이죠. 원시 사회의 코끼리 집단 사냥부터 오늘날 기술사회까지 생산공정은 일정한 정도의 규율성을 늘 요구해왔습니다. 일정 수준의 규율성이 없으면 사회적 생존이 불가능하죠. 물론 한국과 같은 최악의 병영사회에서는 규율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정말 필요했습니다. 한국 지배자들이 필요불가결의 규율성을 넘어 전 사회를 맹종의 피라미드로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교묘하게도 많은 경우에는 "근대 비판자"들은 한국 자본주의적 근대의 최악의 규율주의적 산물인 군대를 주 타깃으로 삼는 양심적 병영거부운동 등에 다소 무관심했습니다. 군대 정도 재벌 독재의 유지에 긴요한 기관과 맞짱뜨는 것은, 다소 위험한 일이거둔요. "수입상"들이 자본도, 국가도 빠진 "근대" 비판에 몰두하는 사이에, "고물상"들은 국가권력의 무한한 강화를 꿈꾸었다가 실패한 정조 같은 반(半)독재자적 국왕들을 "계몽군주"로 만들거나, 외과가 거의 발전되지 않아 간단한 수술도 하지 못했던 전통 한의학을 "근대 의료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우는 등 "전통" 장사에 열을 올렸습니다. 참, 웃겨도 참 웃기는 일은, 지금 남한 인구 사이에 퇴계나 율곡, 다산의 가문들이 소유했던 노비들의 자손들이 그 세 사상가의 자손보다 더 많이 살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퇴계, 율곡, 다산"이라고 할 때에 그 노비들의 참상이 아닌 그 세 명의 양반 노비주의 "위대한 담론"들을 먼저 떠올리는 것입니다. 탈계급화된 의식이, 계급적 존재를 배반하는 장인데, 아무도 신경안쓰는 것 같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개혁", "시민사회", "근대성 비판", "전통"의 판매가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져 "사회주의"와 같은 거북스러운 단어들은 한 때에 거의 다수의 기억을 벗어났지만, 2008년에 시작된 세계 공황은 이 판을 이제 곧 바꿀 것입니다. "개혁"을 백 번 외쳐도 사회주의적 방법으로 부자들의 소득의 상당부분을 부유세를 통해 몰수해 공공부문 일자리를 만들거나 대기업들에게 강제적으로 노동시간 단축과 정규직 증원을 명령하지 않는 이상 계속 심해져가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근대성 비판은 이론적으로 다 재미있지만, 지금대로 간다면, 남미화돼가는 남한의  인구의 상당부분은 대형병원이나 장거리 비행기와 같은 근대 산물들을 접근하기가 많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근대성 운운과 무관하게 돈이 없어서요. 그리고 아무리 "진경시대"가 이태리 르네상스를 백배 초월했다고 과감하게 주장해도, 가난해지는 20대, 30대들이 예전만큼 교양서적을 어차피 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곧 맞이해야 할 시대는 다수의 빈곤화의 시대, 중산층이 소멸돼가는 사회에서의 극적인 갈등들의 심화의 시대, 부동산 버블의 붕괴와 성장 침체의 시대, 그리고 전세계적 자연재해와 자원전쟁, 각종 패권 갈등의 열전화 시대일 것입니다. 이 시대의 근본 문제는, "웰빙"도 "근대성 비판"도 아닌 단순한 다수의 집단 생존일 것이고, 그 생존의 방책은 사회가 전 사회의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이윤추구가 없는 집산적 체제, 즉 사회주의일 것입니다. 물론 스탈린주의와 다른 민주적 사회주의 말씀입니다. 예상컨대, 바로 자본주의의 종언과 "자본주의 그 다음"의 문제는 2010년대의 새로운 화두로 돌아올 것입니다. 반동의 시대여, 안녕히 잘 가라! 
 
 

현재의 역사가 푸코 - 사라밀스 발췌

 - 푸코식으로 역사를 이용하는것은 진보(혹은 퇴보)와 연관된 것이 아니다. ..... 푸코의 역사는 걸코 멈추지 않는 역사이다. 역사가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는 멈추지도 않는다. 푸코식으로 역사를 이용하는 것은 합리적인 또는 바람직한 현재가 도래하고 있다거나 ..... 혹은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현대라는 시간도 과거만큼이나 낯설고 괴상한 시대임을 깨닫는 것이다. (Kendal and Wickam 1999) p. 154

- 몸은 "사건이 각인된 표면 the inscribed surface of events"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치적 사건이나 결정은 우리 몸에 물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렇게 몸에 새겨진 권력의 흔적이 바로 분석대상이라 할 수 있다.   p. 162

-  "개인이 국가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들 각자가 국력을 증강하는 데 공헌 할 수 있었기 떄문이다. 각 개인의 삶과 죽음, 일과 활동 그리고 기쁨은 국가적인 의미를 갖기 시작 하였고, 그에 따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관심사가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p. 163

- 서구의 기독교는 이 놀라운 굴레를 발명해 내어 이를 모든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고 모든 것을 말하도록 강요한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자 말해야만 했고 아무리 작은 잘못이라도 꾸며 내어야 했다. 그 어느 것도 끊임없이 필사적으로 모든 것을 다 토해내는 이 중얼거림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푸코 1979d : 84)

 

-그리스인들에게 사람들 상호간을 구별하는 것은 …..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성적으로 이끌리느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선호하는 성행위 방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행위의 강도였다.”(푸코 1985 : 44) 따라서 성행위를 절제하고 욕구를 조절할 줄 아는 것이 누구와 성 관계를 맺느냐(, 여자냐 남자냐 어린아이냐)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했으며, 이는 개인의 도덕성을 규정하는 척도가 되었다.

 
-1)     성적 행동 방식에 대한 지식.
  2)
성행위의 관행을 통제하는 권력의 시스템
  3) “
개인이 자신을 섹슈얼리티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는 방식

 

-‘이 빈약한 쾌락을 버팀목으로 이용하거나, 그 쾌락을 비밀로 해 두고(쾌락 자체를 비밀스럽게 감춤으로써 아이들이 발견하게끔 만드는 것), 쾌락의 원천을 추구하고, 그 기원과 결과를 밝혀내고, 쾌락을 일으키거나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모든 것을 찾아내었다. 쾌락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감시 장치를 설치하였다. 빠질 수밖에 없는 함정을 파놓고 무궁무진한 교정 담론을 강요하였다. 부모와 선생들은 언제나 경각심을 가지고 모든 아이가 죄인인 양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심의 강도가 충분하지 못할 경우 선생과 부모는 혹여 감시가 철저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 성 의학 담론이 가정환경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푸코 1986d : 322)  p. 171~172

 

-‘어린이의 악행은 해를 기치는 이었다기보다는 조력자에 가까웠다. 그 악행은 제거되어야 할 악으로 지목된 것이다. 하지만 실패가 예정된 이 적과의 싸움에 투여된 그 엄청난 노력은 그것이 그 악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그 악을 극단까지 확산시키기 위함이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권력은 언제나 이런 조력자에 의존하여 발전하고 새로운 자손을 번식하고 결과물을 이끌어 낸다. 반면에 권력의 공격을 받는 대상체는 권력의 번식과 보조를 맞추어, 확장되고, 세분화되며, 새로운 가지를 치면서 현실 속으로 더욱 깊이 침투한다.’ (푸코 1986d : 322)  p. 172~173

 

-대부분의 여성들이 원치 않은 섹스를 한 경험이 있음을 인정했지만, 이런 성행위를 강간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 간의 성적 욕구와 충동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비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간의 관계가 여전히 불평등한 권력관계 위에서 구조화되고 있는 탓에, 몇몇 여성들은 파트너와의 섹스를 거부하지 못한다. 이는 많은 이성애 여성들이 성 관계를 합의consent와 이용성availability 사이의 개념적 모순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지배적 담론이 욕망과 같은 좀 더 적극적인 개념을 무시한 채 합의의 개념을 중심으로 구조화 될 경우, 여성들이 유의미한 방식으로 합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Garvy 1993 : 15)     p. 174~175

 

-  즉, 다른 어떤 병과도 달리 정신병으로 진단 받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실패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신병 환자들이 사회적으로 비난받는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p.194


- '정신병원은 ..... 사법적 공간으로 ....' (푸코)

- "정신건강 서비스는   ..... 사회적 불평등에 의한 고통과 심리적 손상을 '정신병'이라고 낙인찍음으로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공헌한다. " (Williams et al. 2001 : 98)  p. 195


- .... 일종의 담론적 과정으로 이를 통해 사람들은 사회규범과 일반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참조함으로써 정상적인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을 구별하게 된다.      p. 196

- 서구의 인간은 자기 눈으로 자신을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구성해 내었는데, 그는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파악했고, 자신에게 스스로 담론적 존재를 부어하였으며, 그 담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아를 제거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는 빈틈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비이성 Unreason에 대한 경험에서 심리학 혹은 심리학의 진정한 가능성이 탄생했으며, 죽음을 의학적 사유 속에 통합시킴으로써 藥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때 약이란 인간에 대한 학문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푸코 , 재인용 Eribon 1991 : 154)   p. 201

- " ..... 구성하는 주체 the constituent subject의 개념을 떨쳐 내야만 한다."(푸코 1978)  p. 201

- ' 주체가 없는 이 시스템이 무엇이고, 무엇이 생각하느냐고? "나"는 이미 폭파되었다. ..... 이것은 "존재하는 것"의 발견이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17세기적 관점으로 회기한 것처럼 모이지만 차이점이 존재한다. 즉, 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인간이 아닌 익명의 사유체계를, 주체가 없는 지식을, 정체성이 없는 이론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푸코, 재인용  Eribon 1991 : 161)  p. 203


-  푸코는 심리적 고통을 분석할 수 있는 대안적 시스템을 제시하지 않은 채 정신병을 분석한 유일한 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p.204


생각들 생각들

시칠리아의 암소....
김현著, 96년 오늘의 책, 제법 꽤 읽었었네~ 그런데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읽었다는 사실마저 기억하지 못한다.

소은 박홍규 ...
서양철학의 존재론을 꿰뚫은 거의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에 나서 일본에서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불어, 영어를 배웠다. 이정우 선생은 그의 그러한 통찰이 언어능력 때문이라고 보는 듯 하다. 민음사에서 소은 전집(5권)이 발행되었고 이정우선생이 철학아카데미에서 강의 했다. 이정우 선생의 책은 매우 설득력있다. 특히 구어체로 쓰여진 그의 책들은 매우 소중한 책들이다. 개념어의 확립에 애쓰는 모습은 감사하다. 그런데 강의는 쉼표가 너무 많다. 동영상 강의로는 힘에 부친다. 이번에 들뢰즈 강의가 시작 된다. 고민이다.

다시 시칠리아의 암소....
김현 선생은 학자로서 진지함이 몸에 배인 듯하다. 자신이 읽지 않은 자료는 언급하지 않는다. 푸코에 대한 상대적으로 얇은 저 책이 반비례하는 무게를 갖게 된것도 그의 진지함이 만들어낸 것 같다.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이정우譯 ....
역자서문을 읽으면 그 책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역자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작업했는지 등등 많은 것을 알수있다. 번역 작업에 대한 천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번역자를 보고 책을 구입하는 습관이 생겼다.
역자서문에 드러난 이정우 선생의 태도는 한결같이 정갈하다. 원전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개념설정에 대한 어려움 토로... 모든것이 엄밀성을 추구하는데서 오는 일들이다. 철학자가 철학도 하고 번역도 해야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 발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적 본성의 법칙들을 포함해 어떤 자연의 법칙들도 변경할 수 없다. 하지만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로고스의 보편적 법칙이 전제되고 동의가 그런 법칙적 기준에 의존한다 하더라도,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행위 자체는 철저히 인간의 자발적 선택에 놓여 있고,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 자유는 가능성이지 현실은 아니다. 가능성으로서의 자유는 자유의 완성을 위한, 즉 자유를 현실로서 성취하는 데 요구되는 바탕이고 조건이다.   p. 140


그러니까 괜찮아... 생각들

괜찮아, 괜찮아 ....

다 괜찮아~

난 사랑한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은 거라구....


아이들 교육 생각들

비이성적인 존재인 아이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한다는 생각은 뭔가 크게 잘못 되었다.
이런 환상이 왜 생겼을까?

"제국의 후예"와 "바보 영감" -펌글 세상이야기

"제국의 후예"와 "바보 영감" 
만감: 일기장 2010/08/01 00:43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8083 
 
 
 
 
어제 제 인생에 좀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법문을 읽을 일이 있어 제천에 가는 길에 어떤 선지식의 도움으로 대전시에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가를 참배함으로써 제 오랜 숙원을 성취했습니다. 정확한 번지수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 마을일 터인데, 지금이야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 즉 대전의 부근입니다. 도시인데도 이렇다 할 만한 대중교통이 없어 저를 차로 데려다준 선지식의 도움이 아니라면 거기로 가지도 못했을 걸요. "생가"라고 하니 독자 여러분은 아주 오래된 뭔가를 상상하시겠지만 오판일 것입니다. "생가"를, 당국에서 1990년대에 들어서야 "복원", 즉 사실상 고증해서 찾은 "그 자리"에서 다시 지은 것이었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집안은 사실상 끼니도 잘 이어가지 못할 정도의 잔반 계통의 극빈자이었지만 "복원된 생가"는 조금 화려해 보입니다. "대표적인" 시골 선비 주택이라고나 할까요? 참, 가난이 죄가 되는 나라에서는 "민족 영웅"이 극도로 가난하면 좀 안되는 모양이지요? 물론 "민족 영웅"에게는 "민족" 이외의 그 어떤 다른 타이틀을 겸하는 것도 배려심 많은 스파클링 코리아는 살짝 (?) 불허합니다. 생가 쪽의 비문 등 그 무슨 자료를 봐도 신채호가 말년에 동서방 모든 피압박 민중, 민족들이 들고 일어나 예수 크리스토와 같은 착취자들의 정신적 아편의 상징을 호미로 쳐죽일 것을 호소하는 골수 아나키스트가 됐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민족"이 "삼성 민족"을 의미해야 하는 것에서는, "민족 영웅"이 불굴의 아나키스트라면 절대 안되죠. 그리고 재벌 CEO와 교회 쪽 "리더"와 국가 원수가 삼위일체가 될 수 있는 나라에서는, "예수를 쳐죽이자"는 이야기 정도면 벌써 신성 모독일 걸요. 문자 그대로.
 
불순한 모든 요소들이 제거돼 교과서적 "민족, 독립 운동가"로 대전의 부근에서 다시 태어난 (다시 죽은; 아니면 다시 죽임을 당한?) 신채호를 보면서, 저는 독립운동과 오늘날 대한민국의 아주 복잡한 관계를 생각했어요. 우리의 지금 상식에 맞지 않지만, 지금 대다수가 자본주의와 그 한국적 버전 (재벌들이 소유하는 국가와 국민)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 (착각)하듯이, 그 때에도 절대 다수의 유식자들이 총독부가 영원하거나 적어도 아주 오래 가리라고 생각 (착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지금 영문 논문을 외국 학술지에 내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 되듯이, 그 때에도 최남선이나 안확, 이병도 등이 일어로 일본 권위지에 조선이라는 대일본제국의 한 "로칼리티"의 재미있는 특징에 대한 글들을 기고나 하고, 문필적/학술적 권위나 축적하고, 조선이라는 한 "지방"의 문화유산 보존에 노력이나 쏟고 불러주면 교수질이나 하는 등 한 마디로 정해진 범위 내에서 "얌전하게" 살았죠. 그게 "정상"으로 여겨졌고, 단재처럼 외지에서 무일푼 분자로 고생하면서 중국 신문에의 기고로 연명하고 "폭력 분자", 즉 국제 아나키스트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미쓰코시 (三越 - 지금 신세계) 백화점의 3층에서 경양식이나 먹고 경성의 풍경을 즐기는 신사, 숙녀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바보짓"이었죠. 집에서 피아노 소리나 즐기고 다이어트를 잘 지키는 식민지의 대표적 "신사 지식인" 이광수는, "서서 세수하는" 단재를 일종의 바보스러운 돈키호테처럼 묘사했지요. "바보 영감"이라는 별명의 구 대한제국 말기 망명객... 식민모국의 언어와 "문명"을 내면화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총독님께서 요청만 해주시면 당장이라도 "천황폐하를 위한 전국민적 동원"을 외칠 준비가 돼 있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고객님들의 입장에서는 외국환이나 위조해 수류탄 만들 돈을 마련하려다 잡힌 단재는 위험하지도 않았어요. 그는 그냥 웃겼을 뿐에요. 지금의 "주류"에게 송두율이나 오세철과 같은 지식인들이 "우습게" 보이는 것처럼.
 
결국 극좌가 돼버린 단재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식민지 지배층이나 "주류" 지식인들에게 우습거나 답답하게 보였을 뿐이죠. 중간 우파이었던 후기의 상해임시 정부까지 대규모 기업들의 국유화를 외쳤지만, 다수의 독립운동자들은 그렇게 "중간적"이지도 않았어요. 급진 좌파의 박헌영도 급진 우파의 이범석도 - 해방 이후에 서로를 원수로 여겼지만 -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어요. 양쪽은 제국주의를 혐오했으며 시장 경제를 불신했어요. 그걸 노동계급 입장에서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가 돼야 할 단군 자손의 순수한 혈통" 입장에서 하느냐의 차이 등 무시 못할 차이도 있었지만 말에요. 그러나 식민지 안의 "주류"들에게는 시장경제도, '있는 이'들을 '없는 이'들로부터 보호할 외국 제국주의도 요람이자 보호막이었어요. 그들과 단재와 같은 이들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친일"이냐 "반일"이냐는 차이를 넘어, 인간을 명리로 사느냐 도리로 사느냐는 개성의 차이부터 사회가 경쟁으로 이루어져야 하느냐 상부상조로 이루어져야 하느냐는 차이까지, 아주 전반적이었습니다. 결국, 기득권층과 기득권에 도전하는 양심의 차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스파클링 코리아'라는 커다란 수출 기업을 운영하는 CEO와 임원들은 (꼭 생물적 의미라기보다는 이념적, 제도적 의미에서는) 물론 신채호나 이범석의 "적자"들은 아니죠. 미쓰코시 백화점의 고객님이나 화신백화점 주인님의 "적자"라고 보시면 맞을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내부적으로" 보기에는 "서서 세수하고", 조선 안에서 얌전하게 매문업이나 하는 대신에 중국에 가서 수류탄 만들 돈을 구하려다 덜미 잡힌 "바보 영감" 단재는 말 그대로 "또라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저들의 "내부적" 사고를 외면화한 것은 바로 그 유명한 (?) 뉴라이트와 그 "식민지 자본주의 찬양"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솔직한" (?) 이야기를 너무 크게 하면 안에서는 대다수의 "없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과 그 지배자들의 "정통성"을 세뇌시키기가 어려울 것이고, 바깥에서 "정통성"을 둘러싼 대북 경쟁에서도 이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인님들은 저들의 머리를 겨냥하여 수류탄을 던지는 일을 "찬양고무"(?)한 무푼쟁이 아니키스트를 "민족 영웅"으로 인정하여 비문 만들고 "생가"도 "복원"하고 난리 치죠. 임금의 알몸에 뭔가를 걸쳐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러면서도 "아나키스트"와 같은 말을, 저들이 가능만 하면 열심히 지워버립니다. 지금이라도 이 단어는 "제국의 후예"들의 귀에서 수류탄의 굉음으로, 만고의 저주로, 미래에 대한 어떤 불안한 예감으로 계속 들리나 봅니다.
 

난 이런 대화가 필요해 생각들

1.

Calie : You've had sex. You don't want a sex.
           God, is it really possible that you're this insecure?
           You're not just a sex machine, Mark.
           I mean, look, don't get me wrong. You've got skills.
           But you're a good person.

....

Mark : Lexie left.

Calie : Well, because she was too young.
           It was about her, not you.
          Wow. You really don't believe any of this, do you?
          Okay, listen.... you're a good guy.
          You're worth getting to know in daylight.


2.

Teddy : I'd love to have dinner sometime, if.... if... if you're still up for it.

 Mark : I'm not taking you to dinner.

Teddy : Oh.

Mark : I'will take you to lunch.
          Saturday afternoon, in broad daylight.
         We'll eat at a public place.
         then maybe take a walk on a crowded street.
         We'll get to know each other.
         See if we have an interest in the same kind of future,
         because... I want to build a life and a family.
         And I'm not wasting my time on someone who doesn't share the interest.

Teddy : Okay, then.


아~ 이 솔직함과 정확함(자신에 대해 상대에 대해)~ 관심, 애정~
그리고 받아들이는 자세 ....

난 이런 대화가 필요해~
진짜야~ 이러고 싶어~

ㅠ.ㅠ


역전현상 생각들

지배계급은, 그들의 피해자들까지도 그들의 생각을 자발적으로 따르게끔 유도할 만한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직시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는 저들이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고 저들의 헤게모니는 꼭 영원치도 않죠. 어떤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는, 지식인 계층 사이에서는 지배자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비주류는 거의 주류만큼의 권위를 갖게 될 수 있죠.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적 성공은 꼭 비판적 정신의 요람이 되기가 쉽지 않아요...


왜? - [사랑의 단상] 발췌

왜 pourquoi. 사랑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가를 집요하게 자문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이가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다만 말하지 않을 따름이라는 신념 속에 산다.


1. 내게 있어 '최고 가치'는 내 사랑이다. 나는 결코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끝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다. 내 단조로운 담론에는 "왜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으세요"라고 말할 때의 그 똑같은 유일한 '왜'를 제외하고는, 왜라는 말이 없다. 사랑이 완벽하게 만든 이 나를(그렇게도 많이 주고 또 그렇게도 행복하게 만들어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의 모험이 끝난 후에도 살아 남는 그 끈덕진 질문, "왜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나요?" 혹은 "내 마음의 사랑이여 말해보세요, 왜 당신은 날 버렸나요?"

2. 그러나 곧(혹은 동시에) "왜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나요"란 질문은 "왜 날 조금만 사랑하나요"란 질문으로 바뀐다. 어떻게 당신은 날 조금만 사랑할 수 있나요? 조금만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나는 지나침 trop 또는 충분치 않은 것 pas assez 의 체제하에 살고 있기에 일치를 열망하며, 전체가 아닌 것은 모두 인색해 보인다. 내가 찾는 것은 양적인 것이 더 이상 인지 되지 않는, 그리하여 결산한다는 따위의 일이 추방된 그런 장소를 차지하고자 함이다. 혹은 유명론자(唯名論者)이기에, 나를 사랑한다고 왜 당신은 말하지 않으세요?라고 말한다.

3. 사실인즉 엄청난 역설이긴 하지만, 나는 결코 내가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욕망하는 것을 환각한다. 그런데 상처란 의혹보다는 배신에서 더 많이 온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만이 배신할 수 있으며,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 자만이 질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이따금씩 나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저버린다. 바로 거기에 내 불행의 원인이 있다. 하지만 정신착란이란 거기서 깨어날 때야만 존재하는 그런 것이다(그것은 회고적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인가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을 마침내 이해하게 된다. 나는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실은 사랑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이다. 나는 동시에 사랑을 받고 또 버림을 받았다고 믿는 그런 복잡한 상황 속에 살아왔던 것이다. 나의 이 내밀한 언어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 마치 까다로운 아이에게 그러하듯이 - 그가 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죠?라고 소리지르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난 당신을 사랑해요당신은 날 사랑해요가 된다. 어느 날 X는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몇 송이의 난초꽃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곧 그 출처에 대해 환각하기 시작했다. : 그 꽃은 사랑하는 사람만이 보낼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등등. 오랜 시간의 성찰 후에야, 그는 두 가지 추론을 분리하게 되었다 :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반드시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제된 도취 - [사랑의 단상] 발췌

소유의 의지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 저런 방법으로 전유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1. 사랑하는 사람의 한결같은 생각은 "그 사람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게 줄 의무가 있다"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겁이 난 나는 침대 위에 몸을 던지고, 생각을 되씹으며 이제부터는 그 사람의 아무것도 더 이상 소유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비소유의 의지 N.V.S. : Non-vouloir-saisir는 자살의 도치된 한 대체물이다. 자살하지 말 것(사랑 때문에)이라는 말은 그 사람을 소유하려는 것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뜻이다. 로테를 포기할 수도 있었던 그 순간에 베르테르는 자살한다. 포기하냐 아니면 죽느냐(그러므로 그것은 엄숙한 순간이다).

2.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비소유의 의지 또한 보여져서도 안 된다. 말하자면 봉헌의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나는 정념의 그 뜨거운 격앙을 "메마른 삶이나, 죽음의 의지, 그 커다란 무력감"으로 바꾸고 싶지는 않다.
비소유의 의지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격렬하고도 메마른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감각 세계에 자신을 대립시키지 않으면서 내 마음속에 욕망이 자유롭게 회전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을 "내 진실"에 기대게 한다. 그런데 내 진실은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사랑이 결핍될 때, 나는 마치 '포위하기'를 단념하는 군대처럼, 물러가거나 자신을 분산시킨다.

3. 그런데 만약 이 비소유의 의지가 어떤 전략적인 생각이라면(마침내!)? 만약 내가 그 사람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그를 정복하여 한다면(물론 은밀하게?) 그를 보다 더 확실하게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사라진다면? '르베르시reversis'란 카드놀이(최소 득점자가 이기는 놀이)는 현자에게는 잘 알려진 그 위장이라는 것에 근거한다("내 힘은 내 약함에 있다"). 그러나 이 상념은 하나의 술책일 뿐이다. 그것은 내 정념 깊숙이에 자리잡으면서도 내 강박관념이나 고뇌를 건드리지 않는다.

(마지막 함정: 나는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면서 내가 남기게 될 나의 그 "멋있는 이미지"에 흥분하며 황홀해 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그 체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미덕에 대한 어떤 열광 때문에 아르망스는 흥분한다. 그것은 옥타브를 사랑하는 꼬 하나의 방법이었기에.")

4. 비소유의 의지에 대한 상념이 상상적인것의 체제와 단절되기 위해서는 내가 언어 밖의 어디엔가로,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해야만 한다(어떤 막연한 피로감을 핑계대면서). 그것은 어쩌면 단순히 자리에 앉는다 s'asseoir는 행위일지도 모른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어도, 봄은 오고 풀들은 저절로 자란다"). 다시 한번 동양철학을 빌린다면, 비소유의 의지를 소유하지 않으며, 오는것을(그 사람으로부터) 오도록 내버려두며, 가는 것을(그 사람으로부터) 가도록 내버려두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물리치지 아니하며, 받되 보존하지 않으며, 만들되 제 것으로 하지 않는다 등등. 또는 "완벽한 도(道)는 선택하는 것을 피하는 어려움 외에는 어떤 어려움도 제시하지 아니한다."

5. 그러므로 욕망은 여전히 다음과 같은 위험한 움직임으로 비소유의 의지를 적셔놓는다. 내 머릿속에는 사랑해요라는 말이 떠오르지만, 나는 그 말을 입 안에 가두어 발화하지 않는다. 나느 더 이상 나의 그 사람이 아닌, 또는 아직은 나의 그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침묵 속에 말한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자제하고 있다고.

    니체식의 표현: "더 이상 기도하지 말고 찬미하라!"
    신비주의자의 표현: " 가장 감미롭고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 기진맥진한 영혼은 마시지 않고도 취했네! 자유롭고 취한 영혼이여, 잊어버린 잊혀진 영혼이여, 마시지 않고 또 결코 마시지 않을 것에 취해버린 영혼이여!"

자잘한 것들 생각들

1. 외로움은 정말 무섭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무섭다.

진짜 진짜 농담아니다.. 숨을 못쉰다....

정말 정말 정말....   그렇다 .....



2. 제대로 된 관계라는게 무지 어려운듯 보이고 사실 많이 어렵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바람직한 관계란,

'너와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야지~ 우린 성인 이잖아~' 정도인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첫 단계가 '의존성'을 줄이는 거다.

즉, 상대가 어느날 사라져도 차분히 자기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다.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일단 넘어가 달라)

각자가 제대로 독립된 주체가 아닌데 어떻게 서로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도 많은 것을 뒤덮으려 하지 마라.
(예를들면, 미치광이 같은 커플에서 부부생활의 외설스러움이 생긴다.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위해 평생 음식을 만든다.)

또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어'라는 말로 무관심하게 굴지 마라.

먼저 스스로가 독립된 주체로 서야 당신은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그의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더불어 당신도 성장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리나?



3. 완전한 결합에의 꿈

사람들은 그 꿈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만 그것은 지속된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아테네의 묘비 위에는 죽은 사람을 영웅시하는 묘비 대신에 손을 잡고 있는 부부가 서로 작별을 고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들이 헤어지는 것은 단지 제삼의 힘만이 파기할 수 있는 계약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삼의 힘이란 바로 장례이며, 그것은 여기 당신이 안 계신다면 나도 더 이상 나 자신일 수 없습니다하는 표현을 완성한다." 나는 바로 이 재현된 장례 속에서 내 꿈의 증거를 찾는다. 나는 그것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기에 믿을 수 있다(불가능의 유일한 형태는 바로 불멸이다).

개념-뿌리들 2 , 마지막 ... 발췌

5 ㅣ 인생의 기예/창조

가장 위대한 만듦은 기술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죠. 가장 중요한 만듦ㅇ느 우리 인생을, 사회를,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윤리적-정치적 만듦입니다. 다른 남듦들도 윤리적-정치적 비전에 입각해 이루어질 때 진정 의미를 띠게 됩니다. 뛰어난 기술도, 예술도, 또 학문도 사회 전체의 윤리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안목 없이 오로지 자기 분야만 잘 한다고 뛰어난 만듦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그런 것으 느껴요. 유럽 살마들이 만든(물론 유럽이라고 해서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장난감은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세심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혹시 다칠까 봐 조금이라도 튀어나온 곳은 고무를 박아 놓았습니다. 놀이터의 바닥은 (재질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탄력 있게 만들어서 놀다가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도록 해 놓는 등 그 세심함이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장난감을 사려면 특별히 그것을 파는 가게에 가야 합니다. 한국과는 대조적이죠. 우리는 어디에 가나 장난감이 넘쳐 납니다. 서오릉 같은 유적지를 가도, 서울대공원 같은 공원에 가도, 63빌딩 같은 건물에 가도, 어디를 가도 장난감을 팔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상혼(商魂)이 이토록 철저하게 판치는 곳이 또 어디에 있나 싶습니다. 프랑스 뤼옹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도대체 장난감을 본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꼭 그것을 파는 곳에 가야만 살 수 있는 것이죠. 떼트 도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어디에도 장난감 가게는 없습니다. 아니 아예 가게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어요.한국 사람들은 어디에 가나 "염불보다 잿밥"이죠. 구경이나 이야기, 공부는 뒷전이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물건 사고 ........ 이런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쓰레기들만 나뒹굴고.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의 극치죠. 이러 배경하에서 기술이, 예술이, 학문이 ....... 그 자체로서 아무리 발달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한국에는 로봇문화가 대단히 발달해 있죠. 일본의 영향입니다. 우리는 로봇문화가 매우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일본, 미국, 한국 세 나라 정도의 현상입니다. 남자 아이들은 온통 로봇만 가지고 놉니다. 우리 집에도 큰 아이가 사내애라서 로봇 장난감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요. 그런데 로봇들을 보면 어떤 것들은 그 모양이 흉측하기 짝이 없습니다. 애니메이션을 봐도 그렇죠. 등장인물들이 모두 흉측하게 생겼고 아이들 보는 영화인데도 대사가 섬뜩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투를 할 때의 표정들은 어른이 봐도 불쾌할 정도입니다. 또, 그 음향효과들 하며 ....... 그런 것들을 보면서 저런 만화를 만든 인간들의 영혼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 영화를 어른이 봐도 끔찍하게 만드는 인간들, 그들은 그림이나 화면의 배색, 녹음 ......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엄청난 노력을 할 겁니다. 그러나 그 기술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윤리적-정치적으로 저열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이들 영혼을 갉아먹을 뿐입니다. 얼마 전에 [친구]라는 영화를 보고 한 학생이 그것을 흉내내서 진짜 자기 친구를 죽였다고 하잖아요? 이런 현상을 보면 왜 플라톤이 '시인(대중문화)추방론'을 이야기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기술이든 예술이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또 그 무엇이든 오로지 그 자체만을 잘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삶에 대해, 사회에 대해, 역사에 대해, 인간에 대해 넓은 안목을 가지고, 삶 자체를, 세계 자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만듦으로 가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만듦은 우리 삼으리 만듦, 우리의 윤리적-정치적 삶의 양태의 만듦입니다. 이것은 미셀푸코가 말년에 주력했던 문제이기도 하죠. '자기 만들기', '자기돌보기'의 문제죠. 물론 나를 만든다는것은 당연히 나와 얽혀 있는 사회, 역사, 세계를 만든다는 것과 뗄 수 없습니다. 특정한 물건, 특정한 책, 특정한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민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자체, 자기 자체, 사회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고, 다른 만듦들도 이런 만듦의 결을 따라가면서 이루어질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덕과 정의의 만듦보다 더 위대한 만듦은 없는 것이고, 우리는 덕과 정의가 있는 곳에서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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